☁️ 혜
자주 읽고 잃어버리는 사람. 새벽 공기, 여름보다 겨울, 왕가위와 장국영, 홍콩과 러시아, 눈보다는 비, 겨울의 아네모네.
박정대 「남쪽 항구」
Literature 2020.05.16

ㅤ남쪽 항구를 향해 새들이 날아가고 있었네


ㅤ 새들이 날아가는 곳은 언제나 영혼 쪽—다른 쪽은 영혼의 반대편이겠지, 폐기


ㅤ 내면—외면, 폐기


ㅤ 항성—행성, 폐기


ㅤ 한밤의 고속도로—대낮의 국도, 폐기


ㅤ 도플갱어—쌍둥이, 폐기


ㅤ 산청—통영, 갱신


ㅤ 미조—마량, 폐기


ㅤ 사랑의 미래—나는 끊임없이 남쪽을 향해 차를 몰았네, 그곳은 내 사랑의 미래가 피어 있던 곳, 나는 끊임없이 과거를 향해 차를 몰았네, 따스해지고 싶었으므로 필사적으로 나는 사랑의 미래를 향해 나아갔네, 계속


ㅤ 사랑을 한 후에 피우는 당신의 담배가 사랑과 맞부딪혀 다 타버렸어—클리셰가 아닌 가사, 갱신


ㅤ혀끝을 지나 입안 가득 맴도는 담배 연기의 알싸한 맛—시속 140km, 갱신


ㅤ 스며드는 삶—두 겹의 삶, 유효


ㅤ 데이비드 폴드바리—197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생, 갱신


ㅤ 사랑이 끝난 후의 담배—Ta Cigarette Apres L'Amour, 갱신


ㅤ 사랑한 후에 당신은 담배를 피우지—사랑한 후에 나도 담배를 피우지


ㅤ 사랑한 후에 나는 담배를 피우지

ㅤ 그대는 담배 연기로 희미하게 가려진

ㅤ 나를 바라보겠지

ㅤ 오 그러나 그대여,

ㅤ 이게 바로 언제나 반복되는 우리의 삶

ㅤ 사랑이 끝난 후에

ㅤ 이미 나는 또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지

ㅤ 또 다른 일

ㅤ 꿈의 세계에서 현실로 유령처럼 스며드는 일

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ㅤ 공장의 기계로 귀환하는 일


ㅤ 사랑한 후에 나는 담배를 피워

ㅤ 그대는 담배 연기 속에서

ㅤ 희미하게 드러나는 나를 바라봐

ㅤ 오 그대여, 새벽이 오면

ㅤ 우리의 사랑도 사라질 거야

ㅤ 새벽 공기 속으로 슬그머니 스며드는

ㅤ 저 푸른 담배 연기처럼

ㅤ 우리의 사랑도 곧 사라져버릴 거야


ㅤ 밤은 연인들을 환상의 세계로 이끌어내지

ㅤ 그러면 이제 우린 아무런 고백도

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ㅤ 그러나 밤이 끝나고 새벽이 오면

ㅤ 몽롱한 아침이 지나고 대낮이 되면

ㅤ 그대는 황폐한 심장을 외투 속에 감추고

ㅤ 텅 빈 아파트로 돌아가겠지


ㅤ 사랑을 한 후에 나는 담배를 피워

ㅤ 그대는 공중에 희미하게 떠 있는

ㅤ 유령 같은 나를 쳐다봐 

ㅤ 아, 나는 벌써 거울에 비춰진 내 얼굴을 보며

ㅤ 수염을 만지작거리고 있어

ㅤ 나의 습관과 나의 나이

ㅤ 그리고 당신의 나이


ㅤ 사랑한 후에 당신도 담배를 피우지

ㅤ 나는 희미하게 드러나는

ㅤ 당신의 모습을 바라봐

ㅤ 오 그대여,

ㅤ 그대는 절대로 이곳을 다시 찾는 일은 없을 거야

ㅤ 환상과 몽상의 밤은 언제나 우리를

ㅤ 본질적 안식처로 돌아오게 하지만

ㅤ 우리가 아무리 오랫동안

ㅤ 이런 감정에 빠져든다 할지라도

ㅤ 당신과 나는 결국 누구에게도

ㅤ 사랑을 주지 못할 거야


ㅤ 새벽이 오면 우리는 정신을 차리겠지

ㅤ 사랑한 후에 피우는

ㅤ 우리의 담배가 사랑과 맞부딪혀 다 타버렸어

ㅤ 어떡하지

ㅤ 오 그대여, 어떡하지, 폐기


ㅤ 고리끼—고골리, 유효


ㅤ 사랑의 남쪽—오 그래도 나는 끊임없이 따스한 남쪽을 향해 차를 몰았네


ㅤ 천사 금성무—조향사 진혜림, 폐기


ㅤ 고독의 확보—감정의 확장, 갱신


ㅤ 그녀—그녀, 폐기


ㅤ 너—나, 폐기


ㅤ 통영—산청, 폐기


ㅤ統營—통영, 폐기


ㅤ데이비드 폴드바리—나, 폐기


ㅤ內—外, 폐기


ㅤ나—나, 폐기


ㅤ그대—그대, 갱신


ㅤ남쪽 항구를 향해 새들이 날아가고 있었네

ㅤ계속 남쪽 항구를 향해 새들이 날아가고 있었네


ㅤ나도 언제나 남쪽을 향해 미친 듯이 차를 몰아갔고 그대는 남쪽을 사랑의 미래라고 불렀지

ㅤ게리 무어의 긴 기타 리프 소리를 들으며 또 가끔은 잡히지 않던, 생의 주파수를 찾아 라디오 채널을 돌리며 우리는 사랑의 미래로 나아갔네


ㅤ남쪽 항구를 향해 새들이 날아가고 있었네


ㅤ그때 우리도 새들과 함께 날아가고 있었던 거야


ㅤ별처럼 떠 있는 풀꽃들의 창공을 지나 그때 우리도 마치 새처럼 이 지상을 날아가고 있었던 거야


ㅤ남쪽 항구를 향해 새들이 날아가고 있었네


ㅤ달려가는 길 위에서 바람들과 나누던 긴 사랑


ㅤ아니 사랑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만을 나누었네


ㅤ남쪽 항구를 향해 새들이 날아가고 있었네


ㅤ달려가면서도 우린 수시로 갈증이 났지 그래서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의 물로 서로의 입술을 적셔주기도 하였네


ㅤ그럴 때마다 사막 같던 몸에서는 별들이 풀잎처럼 돋아나기도 했지


ㅤ남쪽 항구를 향해 새들이 날아가고 있었네


ㅤ사랑을 하기 위해 아니 사랑에서 가장 멀어지기 위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는지도 몰라


ㅤ달려가는 길 위의 가로수들이 시속 140Km의 엽서를 보내오기도 했지만 우리는 서로의 눈동자를 통해 세상의 모든 음악을 읽었네


ㅤ남쪽 항구를 향해 새들이 날아가고 있었네


ㅤ내가 사랑했던 그대 눈동자의 비자나무 숲이거나 샴나무 숲


ㅤ비와 눈과 바람과 천둥으로 만들어진 길의 날들을 통과하며 우리는 온몸으로 서로를 읽고 있었네


ㅤ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으므로,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만을 나누었지


ㅤ남쪽 항구를 향해 새들이 날아가고 있었네


ㅤ그때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었으므로 다만 한 모금의 술과 한 개비의 담배를 나누어 피었네


ㅤ그때 함께 나누었던 것들이 우리가 알던 유일한 사랑이었으므로, 사랑의 미래는 여전히 우리 것이 아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