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진 「<허니밀크랜드>의 녹슨 이마와 축축한 손」
Literature
2020.06.02
ㅤ어딘가를 가려는데
ㅤ혼자 가기 무서워서 심심해서
ㅤ누군가와 같이 간다면 그 누군가는
ㅤ아무라도 좋은가, 생각하다
ㅤ이왕이면 하필이면
ㅤ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ㅤ하필이면, 그랬다
ㅤ너는 녹슨 이마를 가졌고
ㅤ나는 축축한 손을 가졌다
ㅤ나는 축축한 손으로 네 이마를 만졌고
ㅤ내가 만질 때마다 너는 아팠다
ㅤ네가 아픈 건 내 죄가 아닌데
ㅤ나는 죄책감에 시달려
ㅤ너보다 조금 천천히 걸었다
ㅤ너는 아픈 이유가 나 때문이 아니니까
ㅤ제발 그만 좀 하라며 화를 내었지만
ㅤ내 걸음에 네 걸음을 맞추지 않았다
ㅤ너는 점점 걸음이 빨라지고
ㅤ네 걸음이 빨라질 때마다
ㅤ너의 이마는 점점 더 녹슬었다
ㅤ너는 녹슨 이마로
ㅤ바람을 맞고 비를 맞고 눈을 맞고
ㅤ햇살을 받고 이슬을 맞고 서리를 맞고
ㅤ달빛을 받고, 빛났다
ㅤ나의 축축한 손은
ㅤ여전히 차갑게 네 뒤에서
ㅤ왠지 너를 따라가는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ㅤ나는 누군가와 어딘가를 가려던 것뿐이고
ㅤ하필이면 그 누군가가 너였을 뿐이고
ㅤ너는 나보다 조금 빠른 걸음이었을 뿐이다
ㅤ나는 여전히 축축한 손을 내밀어
ㅤ너의 녹슨 이마를 스친
ㅤ바람을 만졌고 비를 만졌고 눈을 만졌고
ㅤ햇살을 만졌고 이슬을 만졌고
ㅤ결국 내 손은 서리에 어려 달빛에 빛났다
ㅤ내가 만진 건 너였고
ㅤ너는 여전히 아름답게
ㅤ서리가 어린
ㅤ빛나는 녹슨 이마를 가졌지만,
ㅤ너의 뒤를 걷고 있는 나의 손은
ㅤ더 이상 축축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