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
자주 읽고 잃어버리는 사람. 새벽 공기, 여름보다 겨울, 왕가위와 장국영, 홍콩과 러시아, 눈보다는 비, 겨울의 아네모네.
유형진 「<허니밀크랜드>의 녹슨 이마와 축축한 손」
Literature 2020.06.02

ㅤ어딘가를 가려는데

ㅤ혼자 가기 무서워서 심심해서

ㅤ누군가와 같이 간다면 그 누군가는

ㅤ아무라도 좋은가, 생각하다

ㅤ이왕이면 하필이면

ㅤ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ㅤ하필이면, 그랬다


ㅤ너는 녹슨 이마를 가졌고

ㅤ나는 축축한 손을 가졌다


ㅤ나는 축축한 손으로 네 이마를 만졌고

ㅤ내가 만질 때마다 너는 아팠다

ㅤ네가 아픈 건 내 죄가 아닌데

ㅤ나는 죄책감에 시달려

ㅤ너보다 조금 천천히 걸었다


ㅤ너는 아픈 이유가 나 때문이 아니니까

ㅤ제발 그만 좀 하라며 화를 내었지만

ㅤ내 걸음에 네 걸음을 맞추지 않았다

ㅤ너는 점점 걸음이 빨라지고

ㅤ네 걸음이 빨라질 때마다

ㅤ너의 이마는 점점 더 녹슬었다


ㅤ너는 녹슨 이마로

ㅤ바람을 맞고 비를 맞고 눈을 맞고

ㅤ햇살을 받고 이슬을 맞고 서리를 맞고

ㅤ달빛을 받고, 빛났다


ㅤ나의 축축한 손은

ㅤ여전히 차갑게 네 뒤에서

ㅤ왠지 너를 따라가는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ㅤ나는 누군가와 어딘가를 가려던 것뿐이고

ㅤ하필이면 그 누군가가 너였을 뿐이고

ㅤ너는 나보다 조금 빠른 걸음이었을 뿐이다


ㅤ나는 여전히 축축한 손을 내밀어

ㅤ너의 녹슨 이마를 스친

ㅤ바람을 만졌고 비를 만졌고 눈을 만졌고

ㅤ햇살을 만졌고 이슬을 만졌고

ㅤ결국 내 손은 서리에 어려 달빛에 빛났다

ㅤ내가 만진 건 너였고

ㅤ너는 여전히 아름답게

ㅤ서리가 어린

ㅤ빛나는 녹슨 이마를 가졌지만,


ㅤ너의 뒤를 걷고 있는 나의 손은

ㅤ더 이상 축축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