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
자주 읽고 잃어버리는 사람. 새벽 공기, 여름보다 겨울, 왕가위와 장국영, 홍콩과 러시아, 눈보다는 비, 겨울의 아네모네.
김안 「유령림」
Literature 2020.06.02

ㅤ선생님은 살아남는 자는 늘 빠르다고,

ㅤ나머지는 소심하기 짝이 없는 괴물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죠.

ㅤ가로수마다 악저(惡疽)가 부풀어오릅니다.

ㅤ그것을 오랫동안 바라보면

ㅤ한때 우리가 작고 보드라운 묘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ㅤ선생님, 그때는 비가 와도 아무도 젖지 않았습니다.

ㅤ눈을 감아도 이 세계에는 아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ㅤ선생님은 그 시절을 알고 계시죠?

ㅤ선생님의 오래된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ㅤ하지만 그것은 꼭 비열한 추억의 정직함만 같습니다.

ㅤ선생님, 비가 옵니다.

ㅤ제 뼈보다 희고 굵은,

ㅤ제 뼈보다 무겁고 뜨거운 비입니다. 투두둑.

ㅤ우산살이 하나하나 부러집니다.

ㅤ선생님의 그 오래된 풍경은 아직도 젖어 있나요?

ㅤ선생님, 전 어린 시절 개에게 물려 죽을 뻔한 적이 있습니다.

ㅤ그때 아버지의 몽둥이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ㅤ정확하게

ㅤ개의 정수리를 내리쳤습니다.

ㅤ개보다 나은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지만,

ㅤ개보다 큰 비명을 지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ㅤ먹장구름 사이 드문드문 빛나는 별은 죽은 개들의 안광만 같습니다.

ㅤ선생님, 저를 보세요.

ㅤ온몸에 뿔을 꽂고 있습니다.

ㅤ가로수 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깁니다.

ㅤ온몸을 비벼 악저를 파헤치면 작고 보드라운 묘혈

ㅤ그 속으로 들어가 웅크립니다.

ㅤ개가죽을 뒤집어쓴 채 흘러가는 세월을 봅니다.

ㅤ비가 와도 젖지 않는 하얀 유령림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