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
자주 읽고 잃어버리는 사람. 새벽 공기, 여름보다 겨울, 왕가위와 장국영, 홍콩과 러시아, 눈보다는 비, 겨울의 아네모네.
강혜빈 「미니멀리스트」
Literature 2020.06.02

나는 말들이 스스로 하고 싶어 하고

해야만 하는 걸 하는 것의 느낌을 좋아한다

— 거트루드 스타인


ㅤ찢어진 이불을 덮고 잤다


ㅤ오랫동안

ㅤ찢어진 마음에 골몰하였다


ㅤ깨어날 수 있다면

ㅤ불길한 꿈은 복된 꿈으로


ㅤ빛 속으로 풀쩍

ㅤ뛰어든 고라니가 무사하므로

ㅤ오래된 건물이 무너짐을 마쳤으므로

ㅤ돌아가신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으므로


ㅤ기지개를 켜듯 이불의 세계는

ㅤ영원히 넓어지기

ㅤ모름지기 비밀이란 말하지 않음으로

ㅤ책임을 다 한 것으로


ㅤ어디든 누가 살다 간 자리

ㅤ어디든 누가 죽어간 자리


ㅤ오랫동안 비어 있던 서랍은

ㅤ신념을 가지게 된다


ㅤ“가끔 우리가 살아 있는 게 기적 같아”


ㅤ이 세계에는 매일매일 근사한 일이

ㅤ무화과 스콘 굽는 냄새가

ㅤ누군가

ㅤ3초에 한 번씩 끔찍하게


ㅤ복선을 거두어 가지 않으면서

ㅤ한 줌의 사랑을 꿰매어주면서

ㅤ“혹시 사람을 좋아하세요?”


ㅤ더는 버틸 수 없는 질문에 대해

ㅤ대답하지 않기로


ㅤ내가 나인 것을 증명하지 않아도 될 때

ㅤ긴 잠에 빠진 나를 흔들어 깨울 때


ㅤ아래층에서 굉음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