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
자주 읽고 잃어버리는 사람. 새벽 공기, 여름보다 겨울, 왕가위와 장국영, 홍콩과 러시아, 눈보다는 비, 겨울의 아네모네.
이영주 「빈 화분」
Literature 2020.06.02

ㅤ우리는 울기도 전에

ㅤ다정한 말들을 썼습니다

ㅤ이게 어울릴까

ㅤ서로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어두운 가루들이 떨어져버리는

ㅤ죽은 시간 속에서


ㅤ늙은 우리는 스무 살에 살던 방에 들어가

ㅤ버려진 화분을 들여다보았던 것입니다

ㅤ이 방에서 하루치의 잠을 다녀간 친구들은

ㅤ조금씩 돋아나는 썩은 잎을 먹고 또 먹었죠


ㅤ맛있지

ㅤ응 맛있어


ㅤ잊고 싶은 것들은 화분에 묻어두자

ㅤ우리는 너무 닮아 있구나


ㅤ모든 독성을 받아먹고

ㅤ화분은 오랫동안 흙을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ㅤ불운으로 가득 찬 이 방에 숨어

ㅤ깨지 않는 잠 속으로 들어가려고


ㅤ그러고 나서 쓸까

ㅤ연필이 부러지고

ㅤ자꾸만 부서지고 잿빛 가루로 타버릴 동안


ㅤ죽은 우리는 화분에서

ㅤ서로에게 몸을 비비다가


ㅤ그러고 보니 우리는 자란 것이 없다


ㅤ빈 책상에서 일어납니다

ㅤ고백보다는 매혹이어야 한다고 믿었던 시간이

ㅤ하수구로 떠내려갑니다


ㅤ아픈 것들을 버릴 때마다

ㅤ모두가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