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
자주 읽고 잃어버리는 사람. 새벽 공기, 여름보다 겨울, 왕가위와 장국영, 홍콩과 러시아, 눈보다는 비, 겨울의 아네모네.
김혜순 「새의 반복」
Literature 2020.09.12

ㅤ저 나무 꼭대기에 앉은 새가 하는 얘기는 다 내 얘기다

ㅤ내가 거짓말한 것 도둑질한 것 등등 소문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ㅤ내가 태어나서 죽었다는 그런 흔한 얘기다

ㅤ내가 그만하라고 다른 얘기 좀 하라고 해도 다 내 얘기만 하는 새

ㅤ일평생 같은 하이힐만 신고 돌아다니는 여자의 구두굽 소리같이 똑같은 얘기

ㅤ그래서 나에겐 부러뜨리고 싶은 새가 있다


ㅤ깨끗한 A4용지를 한묶움 사서

ㅤ한 장 한 장 구겨서 버리는 시인처럼

ㅤ나에겐 꺾고 싶은 새가 있다

ㅤ마주 보는 거울 안의 한 가문 식솔들 같은 내 시들을 구겨놓으면

ㅤ거기서 날개를 푸드덕거리는 새들의 얘기가 들렸다

ㅤ너는 태어나서 죽었다고

ㅤ그러면 나는 이런 가위 같은 주둥아리들을 보았나

ㅤ문서 세단기를 사서

ㅤ시집들을 낱낱이 썰어버렸는데

ㅤ나중에 문서 세단기 뚜껑을 열어보니 아예 거기 새들이 가득 앉아

ㅤ한 줄 한 줄 글을 읽는 양 내 얘기를 하고 있었다

ㅤ심지어 서로서로 다른 얼굴까지 갖춰 달고

ㅤ암컷들은 알까지 품고 내 얘기를 하고 있었다

ㅤ하늘을 날 생각은 하지도 않고

ㅤ한 그루 땅콩나무 아래 땅콩들처럼

ㅤ땅속에 모여 앉아 내 얘기를 하고 있었다

ㅤ그래서 내가 태어나서 죽었다는 그런 흔한 얘기 말고

ㅤ다른 얘기 좀 하라고

ㅤ이를테면 내가 늘 같은 하이힐만 신고 출근하고 퇴근하지만

ㅤ같은 공원 같은 나무 아래에 이르면

ㅤ늘 왈츠를 한번 추고 간다는 얘기 같은 거

ㅤ그 나무 아래서 달을 안아보는 동작을 여러 번 해본다는 얘기 같은 거

ㅤ그런 거 좀 하랬더니

ㅤ나는 새 속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ㅤ그 반대가 아니라

ㅤ나는 새 속에서 죽었다고 했다

ㅤ그 반대가 아니라

ㅤ내가 태어나서 죽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