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
자주 읽고 잃어버리는 사람. 새벽 공기, 여름보다 겨울, 왕가위와 장국영, 홍콩과 러시아, 눈보다는 비, 겨울의 아네모네.
박은정 「302호」
Literature 2020.09.15

ㅤ빗소리가 귓바퀴에 모래알처럼 쌓이고

ㅤ우리는 마지막 담배를 나누어 피운다


ㅤ이제 악수를 나누며 헤어져야 할 시간, 언젠가 읽다 덮은 소설처럼 시선을 거두고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ㅤ이럴 줄 알았다면 새로 산 스웨터를 입고 멋진 작별 인사를 연습해 두는 건데


ㅤ고장 난 짐승처럼 누워 천장을 보고 있으면 곧 죽을 듯 일생이 파노라마로 지나가지 멍청한 우리는 입을 벌리고


ㅤ아름답구나 무어라 말할 수 없이

ㅤ요상하고 아름답구나


ㅤ의미 없이 혼잣말을 들려주는 일이 좋아서

ㅤ어릴 적 죽도록 오빠에게 맞던 기억이나 동생이 연못에 빠졌던 기억들도 오래 알고 지낸 사람에게 들려주듯


ㅤ사랑을 다시 말하기엔 늙었고

ㅤ이별을 다시 말하기엔 지쳤기에


ㅤ모르는 사람처럼 각자의 신발을 신고

ㅤ다시없을 다음을 기약하도록


ㅤ창밖엔 구름 웅덩이

ㅤ불 꺼진 방엔 모스부호처럼 떠도는 말들


ㅤ꿈 없는 눈으로 앓듯

ㅤ자꾸만 이불을 뒤척이는 기분을 아니


ㅤ우박이 떨어지고 크리스마스가 오고 그 해 마지막 기도가 잊히면 가엽고 따뜻한 입술에는 못다 한 인사만 남아


ㅤ어젯밤 당신은 인간의 말을 버리고

ㅤ짐승의 음성으로 일생을 울어 주었는데


ㅤ낡은 액자 속에는 목동과 어린 양들

ㅤ마지막 새해 기도를 올리고


ㅤ내가 가진 슬픔은 작고 부드러워

ㅤ두 손이 붉게 물들 때까지


ㅤ주여, 우리를 한입에 삼키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