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
자주 읽고 잃어버리는 사람. 새벽 공기, 여름보다 겨울, 왕가위와 장국영, 홍콩과 러시아, 눈보다는 비, 겨울의 아네모네.
안희연 「업힌」
Literature 2020.09.22

ㅤ산책 가기 싫어서 죽은 척하는 강아지를 봤어


ㅤ애벌레처럼 둥글게 몸을 말고

ㅤ나는 돌이다, 나는 돌이다 중얼거리는 하루


ㅤ이대로 입이 지겨워버렸으면, 싶다가도

ㅤ무당벌레의 무늬는 탐이 나서

ㅤ공중을 떠도는 먼지들의 저공비행을

ㅤ유심히 바라보게 되는 하루


ㅤ생각으로 짓는 죄가 사람을 어디까지 망가뜨릴 수 있을까

ㅤ이해받고 용서받기 위해

ㅤ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대치란 무엇일까


ㅤ화면 속 강아지는 여전히 죽은 척하고 있다

ㅤ꼬리를 툭 건드려도 미동이 없다


ㅤ미동, 그러니까 미동

ㅤ불을 켜지 않은 식탁에서 밥을 물에 말아 먹는 일


ㅤ이 나뭇잎에서 저 나뭇잎으로 옮겨가는 애벌레처럼

ㅤ그저 하루를 갉아 먹는 것이 최선인


ㅤ살아 있음,

ㅤ나는 최선을 다해 산 척을 하는 것 같다

ㅤ실패하지 않은 내가 남아 있다고 믿는 것 같다


ㅤ애벌레는 무사히 무당벌레가 될 수 있을까

ㅤ무당벌레는 자신의 무늬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까


ㅤ예쁜 걸 곁에 두면 예뻐질 줄 알고

ㅤ책상 위에 차곡차곡 모아온 것들


ㅤ나무를 깎아 만든 부엉이, 퀼트로 된 새 인형, 엽서 속 검은 고양이, 한쌍의 천사 조각상이

ㅤ일제히 나를 쳐다보는 순간이 있다

ㅤ나는 자주 그게 끔찍해 보인다